사람이 있다부재와 부재를 잇다 – 박연희 가야금 연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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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금 연주자 박연희.


내일은 오늘과 가깝지만 아직 오지 않았기에 무한히 멀고, 내 곁의 타인은 닿을 순 있지만 내가 아니기에 내게서 무한히 멀다. 사람들은 그 ‘무한히 먼’ 거리 속에서 외로움을 느끼고, 그 사이를 헤매며 삶을 살아간다. 예술가는 때로 누구보다 더 적극적으로 헤매는 사람이어서 누구보다 더 외롭다. 이 외로움을 다루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어떤 예술가들은 예술을 통해 이곳과 저곳 사이를 가로지를 수 있다고 믿는다. 그 믿음으로 오지 않은 내일에 도착하려 하고, 내가 아닌 타인에게 닿으려 한다.

 

가야금 연주자이자 국악 선생님인 박연희(41) 씨는 정석 코스를 밟으며 국악을 전공했으며, 국가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 산조 및 병창을 이수한 국악인이다. 공연 예술가로서의 삶만을 살았던 그는 무대에서 관객과 호흡을 주고받는 시간을 사랑했다. 그러다 지난 2004년, 운명처럼 인생 제2막이 펼쳐졌다. 강원도 평창이라는 공간, 그리고 그곳의 아이들과 만난 것이 그 시작이었다. 아이들을 가르치며 교단 역시 사람들과 소통하는 또 다른 무대임을 체험한 그는 이후 서울과 강원도를 오가며 국악을 전파하는 조금은 특이한 이력을 인생에 덧붙이게 됐다.


연희 씨는 예술을 통해, 또 교육을 통해 타인이라는 무한한 미지의 세계에 닿고자 한다. 학생들을 가르치며 가장 힘들었던 순간에 대해 묻자, 정을 쏟았지만 그를 깊이 아는 데에는 실패했던 기억을 꼽을 정도로 사람에 대한 애정이 깊다. 많은 사랑을 가진 사람은 상처도 많이 받는다. 그럼에도 그는 삶에의 낙관이 깃든 미소를 지을 줄 알았다.

 

지난 7월 6일, 서울 상수역 부근 제비다방에서 연희 씨를 만났다. 15년의 세월을 반추하면서 박연희 씨는 뿌듯함과 보람, 아쉬움 등의 복잡한 감정을 하나하나 생생하게 떠올렸다.

 

“평창은 제2의 고향이에요. 처음 평창을 방문한 건 2004년이었어요. 그때 문화예술교육 정책이 막 시행됐어요. 시범사업을 운영하던 때였는데, 마침 제가 존경하는 감자꽃스튜디오 이선철 대표님이 아이들을 가르친다 하셔서 평창중학교를 찾아 갔었죠.”

 

그 역시 여느 서울 사람처럼 서울 밖의 풍경에 대해 무지한 편이었다. 그는 “부끄러운 얘기”라며 당시 강원도에 갖고 있던 편견이 깨지던 순간을 소탈하게 고백했다.

 

“그때 프로그램 콘셉트가 ‘언니’나 ‘오빠’라고 할 수 있는 젊은 국악인들이 평창의 어린이들에게 국악을 가르친다는 거였어요. 국악은 나이 많은 사람들만의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깨고 싶었죠. 영화 ‹선생 김봉두› 같은 작품이 개봉하던 때라서, 그때만 해도 저는 강원도에 사는 아이들은 정말 시골의 모습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버스에서 내리니까 갑자기 ‘이효리’들이 보이더라고요. 애들이 서울에 놀러 와 동대문에서 옷을 사서 그렇게 입고 다닌다는 거예요. 정말 충격이었죠.”

 

아이들에게 갖고 있던 편견은 산산이 깨졌다. 그러나 이후 몸으로 체험한 당시 강원도 지역의 여건은 편견 그 이상이었다. 서울에서 평창은 낮에 출발하면 저녁에 도착할 수 있는 곳이었으며, 낮과 저녁만큼 격차가 있는 지역이었다. 다른 게 아니라, 인프라의 문제였다.


“정말 산골로 들어가지 않는 이상 아이들은 다 비슷해요. 문제는 인프라죠. 너무 부족했습니다. 일단 거기서 국악을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 서울에 사는 우리를 불렀다는 것부터가 인력 부족에 대한 증명이었죠. 아쉬웠던 게, 그때 제가 참여했던 지원 사업이 2007년에 끝났어요. 그 뒤로 국악 프로그램이 자생할 수 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죠. 사람이 부족했던 거예요. 악기도 부족했지만요. 국악을 가르치려면 전문 외부 강사도 필요하지만, 학교 안에서도 국악 교육에 열의가 있는 분이 한 명은 있어야 해요. 평창에 비하면 서울은 사람도 바로 구할 수 있으니 참 많이 다르죠. 정보도 빠르고, 국악 공연이 있으면 지하철 타고 보러 갈 수도 있고.”


그 해에는 박연희 씨를 포함해 총 다섯 명의 젊은 국악인들이 수십 명의 중학교 학생들을 가르쳤다. 첫 차를 타고 평창으로 가 수업을 하고 저녁에 다시 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오는 고된 일정이었지만 보람이 그 모든 걸 극복하게 했다. 물론, 모든 보람은 학생들로부터 나왔다. 연희 씨에게 기억에 남는 학생이 있느냐고 물었다.


“첫 해 가야금반의 ‘날라리’들이 기억나요. 그 반에 또 전교 꼴등 남자아이가 하나 있었거든요. 그 애가 수업시간 내내 딴 짓만 하고 도통 집중을 못하는 거예요. 참 많이 속상했죠. 그러다 여름에 아이들과 함께 3박 4일 캠프를 떠났는데, 그날 종일 그 친구랑 붙어서 지켜보니 그 애가 왜 그랬는지 알겠더라고요. 악보 읽는 법을 몰랐던 거예요. 다른 애들은 다 잘하니까 차마 말을 못 했겠죠. 악보를 못 읽는 학생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해 본 적이 없어서, 저도 그 부분을 챙기지 못했던 거고요. 그 다음부터 제가 그 아이를 위해 음계를 하나하나 써 줬어요. 그러면서 그 아이도 수업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죠.”


연희 씨는 그 때 그 학생이 지금은 삼십대가 되었을 거라며, 잠시 그 모습을 상상했다. 모든 게 서툴렀던 ‘초보 교육자’ 시절의 이야기에서는 그가 여태껏 마음속에 담아온 아쉬움이 또렷하게 느껴졌다.


“제가 욕심을 너무 많이 부렸어요. 나의 입장에서만 학생들을 대했던 거죠. 왜 이걸 못하지, 하면서 계속 이해를 못 했어요. 학생들의 입장에서 봤어야 했는데 그땐 그걸 몰랐어요. 힘들었던 것들을 돌이켜 보면 다 저의 문제였다 싶어요. 다시 돌아가면 그때보다는 더 잘 가르치고 싶어요. 학생들이 국악을 좀 더 편하고 즐겁게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 그게 중요한 거였는데, 이론이나 그런 것들은 그 다음이었는데 말이죠. 욕심이 앞서서 그런 걸 많이 놓쳤어요.”


강원도 정선, 전교생이 5명이었던 예미초등학교 고성분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던 일도 박연희 씨 인생의 큰 사건 중 하나다.


“인순이 씨가 진행하는 ‘거위의 꿈’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어요. 거기서 고성분교의 사연이 채택됐었죠. 학생들이 음악을 배우고 싶어 하는데 선생님이 없다는 거였어요. 그 학교는 평창 읍내에서도 한 시간 반이 걸리는 아주 시골 학교예요. 일주일에 1000km를 달리면서 아이들을 가르쳤어요. 제가 강원도와 사랑에 빠지는 시간들이었죠. 하루의 시간에 따라 하늘이 변하는 모습, 계절 따라 풍경이 달라지는 모습, 참 아름다웠어요. ‘별빛이 쏟아진다’는 게 어떤 말인지 처음으로 몸으로 느낄 수 있었죠. 제 인생 1기는 국악을 배우고 학업을 마무리하고 돈을 벌던 시기고, 2004년 이후로는 자유로운 영혼으로 거듭나는 인생 2기라고 생각합니다.”


평창중학교를 만난 2004년을 인생의 큰 기점으로 삼을 만큼 교육과 강원도는 그에게 큰 의미다. 여러 아쉬움이 꼬리표처럼 붙는 나날이었지만, 그 와중에도 추억과 기쁨, 보람은 곳곳에 씨앗으로 박혀 십여 년의 시간이 흘러서는 반가운 재회로 꽃을 피우기도 했다.


2004년 평창중학교에서 학교-지역사회 연계 문화예술교육 시범사업으로 진행되었던 국악 교육 프로그램


“이번에 평창 원주 터득골 콘서트를 함께했는데, 거기서 일하는 친구가 제가 2004년에 처음으로 평창에서 가르쳤던 학생인 거예요. 어린 꼬마였는데 지금은 아가씨가 다 됐더라고요. 이제는 사장님이라고 불러야 해요. 하하.”


박연희 씨는 현재는 잠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보다 공연과 음악에 열중하고 있다. 국악 크로스 오버 밴드 ‘연희별곡’의 멤버로서 다양한 활동을 펼치는 중이다. 작년에는 ‘예술 배달 프로젝트’를 기획해 강원도 곳곳을 돌아다니며 찾아가는 국악 공연으로 강원도민의 귀와 심장에 연희별곡만의 편안하고 부드러운 선율을 선물했다. 옛 제자를 다시 만나게 해 준 터득골 콘서트도 그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참여하게 된 것이었다.


“‘예술 배달 프로젝트’를 통해 강원도에 대한 애정을 다시 확인했어요. 터득골 콘서트가 참 기억에 남아요. 야외 무대였는데, 태풍 때문에 일정이 계속 미뤄져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던 기억이 나요. 그러다가 11월에서야 공연이 열렸는데, 딱 저희가 공연하는 날에만 나무에 단풍이 예쁘게 든 거예요. 터득골만의 풍경이었죠. 그런 순간순간 속에 있을 때, 연희별곡이 지역의 특색을 보여주는 공연을 만들어냈다는 자부심을 느껴요.”


박연희 씨가 멤버로 활동하는 국악 크로스 오버 밴드 ‘연희별곡’의 터득골 예술배달프로젝트 공연


모든 공연이 애틋하고 소중하지만, 2020년의 공연들은 박연희 씨와 연희별곡에게 유독 남다르다. 최근 공연‧예술계가 코로나19 때문에 급격하게 위축됐기 때문이다. 연희 씨 역시 작년 한 해 공연을 80회 이상 꾸렸지만, 올 상반기에는 고작 5회만 진행할 수 있었다. 낙담하기 쉬운 상황에서도 그는 “저는 운이 좋은 편”이라며 긍정적인 의지를 잃지 않았다. 그에게 2020년은 느긋한 리듬으로 다가가야 하는 해다.


“내실을 다지는 기간이라고 생각해요. 숨고르기를 할 때라고 마음을 다잡죠. 우리가 콘텐츠만 확실하게 갖고 있다면, 어떻게든 살아남을 수 있을 거예요. 남은 숙제는 환경을 만드는 거죠. 운도 물론 따라줘야 하지만요.”


전 세계 곳곳에서, 또 국내에서 예술가들은 관객을 만날 방법을 끝없이 궁리 중이다. 어려운 시국 속 대안 중 하나로 떠오른 게 ‘비대면 공연’이다. 박연희 씨는 비대면 공연의 효과를 긍정하면서도 그게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라고 여겼다.


“해외 유명 공연을 온라인을 통해 무료로 볼 수 있었던 건 좋았어요. 상당히 새로운 체험이었죠. 우리가 일상에서 쉽게 만나던 사람들과는 멀어졌는데, 지구 반대편에 있는 분들과는 오히려 가까워진 게 흥미로워요. 하지만 코로나19가 계속돼도 현장의 공연은 사라지지 않을 거예요. 비대면 공연은 하나의 수단일 뿐이에요. 공연계를 살리는 방법이 되지는 못한다고 봐요. 현장감이라는 건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거거든요. 공연 예술은 현장감이 생명이기도 하고요.”


대형 공연장에서의 관람이 어려워진 이때, 적은 인원으로 굴러가는 소규모 공연장이 오히려 힘을 얻을 수도 있다는 필자의 의견에 박연희 씨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간의 고민과 생각을 털어 놓았다. 그의 고민은 특히, 강원도에 닿아 있었다.


“강원도 쪽에서도 걱정이 많아요. 메밀꽃축제도 최근 취소됐거든요. 소규모여도 괜찮으니 안전하게 가는 방향을 모색해 봐야죠. 이효석 문학관에서 공연을 해보면 어떨까 싶기도 해요. 지금 강원도에도 다시 관광객들이 오고 있어요. 참 고민이죠. 결국 방역 체계를 강화하는 수밖에 없을 듯합니다. 자기책임제, 실명제, 사전예약제가 필요하다고 봐요. 나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각자가 분명히 인지하고 있어야 하죠. 책임감이 개개인 모두에게 주어져야 해요.”


한편 공연의 기회가 줄어들면서 연희별곡 멤버들은 이전보다 더 자주 모일 수 있게 되었다. 연희 씨는 관계가 돈독해지는 걸 느낀다며 2020년을 “준비하는 기간”이라고 일컬었다. 여유가 생기면서 강원도에서의 ‘한 달 살기’ 소망을 이루기도 했다.


봉평 '강원 작가의 방' 레지던시에 참여하며 직접 촬영했던 사진


“‘강원 작가의 방’이란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해 봉평에서 한 달을 보냈어요. 이번 한 달 살기 목표는 리서치였습니다. 원래도 강원도를 자주 갔지만, 서울을 왔다 갔다 하느라 구석구석 보진 못했거든요. 이번에는 아예 봉평을 거점으로 삼아 강원도 곳곳을 작정하고 돌아다녔어요. 강원도 지역의 공연도 많이 볼 수 있었죠. 다시 시작하는 기분이에요.”


지역 문화 예술의 활로를 모색하는 삶을 살아온 사람으로서, 또 작은 공연장과 동고동락하는 사람으로서, 박연희 씨의 현재 목표는 ‘자생’이다.


“아주 유명한 분들은 어떻게든 공연을 계속할 수 있어요. 하지만 지역에서 활동하거나, 무명인 음악가에게는 사정이 다르죠. 보여줄 기회가 정말 부족해요. 저희(연희별곡)는 자생이 목표예요. 자생하는 선배가 되고 싶습니다. 요즘은 영화관을 활용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어떤 경우에는 영화관이 대공연장보다 더 쾌적한 환경을 제공하기도 하거든요. 영화관과 공연 팀이 서로 상생할 수 있는 방법이 될 수도 있다고 봅니다.”


박연희 씨는 사람, 그리고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에 대한 애정으로 미래를 그려간다. 그렇기에 사람을 향한 음악과 공연에 대한 도전은 멈추지 않는다. 강원도의 국악밴드를 만들어 보고 싶고, 캠프도 운영해 보고 싶다. 올해는 또 음악극을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다. 메밀꽃, 감자꽃 등 강원도의 꽃을 소재로 강원 남북부를 오가는 여정을 그림과 음악으로 보여줄 생각이다. 극이 완성되면 평창, 강릉, 춘천 등지의 학교를 돌면서 투어도 하고 싶다. 그에게 국악, 공연, 교육은 부재와 부재를 잇는 과정이다. 서울과 강원도 사이의 긴 부재를, 음악가와 관객 사이의 고요한 부재를, 오늘과 내일 사이의 아직 오지 않은 희망의 부재를, 그는 음악으로 잇고 있다.


“저는 사람들과 호흡하고 소통하는 시간이 좋아요. 음악가로서 있을 때나, 교육자로 있을 때나 그런 순간들을 좋아합니다. 사람들의 반응에서 새로운 힘을 얻고, 거기서 또 제가 새로운 이야기를 전할 수 있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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