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을 잇다코로나19로 상실된 예술 감상의 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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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큐레이터로서 이색적인 경험을 했다. 원인은 코로나19 바이러스다. 상황을 풀어서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나는 2020년 인천아트플랫폼에 레지던시 기획자로 입주하게 되었다. 인천 중구 개항동에는 인천문화재단에서 운영하는 인천아트플랫폼이라는 복합문화공간이 존재한다. 과거 대한통운의 창고로 사용하던 이곳은 근대건축문화의 유산이 남아 있는 고즈넉하고 멋스러운 공간이다. 이곳에서는 전시와 공연도 진행되지만, 예술가들이 거주하면서 작업 활동을 하는 아트 레지던시(art residency: 예술가들이 입주하여 창작활동을 하는 스튜디오, 혹은 그 시스템)도 운영된다. 인천아트플랫폼은 매년 십여 명의 공연예술가와 시각예술가를 선발하는데, 몇 해 전부터는 기획자와 비평가도 한 명씩 초청하고 있고, 나는 올해의 기획자로 입주하게 되었다. 


문제는 코로나19 사태였다. 올해 2월로 예정된 입주 계획부터 엉키기 시작했다. 정부에서 내려온 국공립기관 폐쇄명령 조치에 따라 레지던시는 입주 시기를 두 번이나 연기하게 됐다. 레지던시라는 시스템이 십여 명의 예술가들이 모여 있는 단체 활동이고 주방이나 워크숍룸 등의 공용 공간이 있다 보니 정부에서 내려온 지침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코로나19 팬데믹의 첫 번째 직격탄은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작가들은 ‘창작 공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직업이다. 또한 레지던시는 몇 백 대 일의 경쟁률을 뚫고 1년이란 제한적인 입주 기간이 주어지는 프로그램인데, 이렇게 차질이 생겨버린 것이다. 


코로나19는 창작뿐만 아니라 ‘발표’와 ‘전시’에도 마수를 뻗쳤다. 인천아트플랫폼 입주 작가들은 ‘창제작 발표’를 해야 하는데, 나는 평소 기획하던 전시 중 하나인 ‹컨템포러리 패턴즈 Contemporary Patterns›라는 전시를 선보였다. 현대미술 영역에서 그동안 소외됐던 ‘패턴’이나 ‘공예성’, ‘장식성’ 등의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다시 조망하자는 취지에서, 패턴과 관련된 작업을 진행하는 작가 세 명을 섭외해 그룹전으로 구성한 전시였다. 그런데 전시를 기획하고 준비하는 과정에서 정부의 지침이 떨어졌다. 공공장소에서의 사회적 거리두기 지침으로 국공립 미술관과 박물관의 전시 활동을 무기한 연기한 것이다. 중간 중간 인천과 이태원 등에서 발생한 감염자 확산 사태 등도 한몫했다. 재미있는 현상은 그 다음부터 벌어졌다. 


큐레이터와 작가 3인, 그리고 인천아트플랫폼의 직원 등은 모두 기존과 똑같이 전시를 준비했다. 기획서를 쓰고 작가를 섭외하고 작품을 선택해 운송과 설치 과정을 밟았다. 작가와 큐레이터, 운송 업체가 모두 마스크를 쓰고 작품을 설치했다. 약간의 기울임이나 섬세한 높이 조절에 심혈을 기울이고, 혹여 작품에 손상이 갈까봐 긴장을 유지하며 설치 작업을 끝냈다. 그런데 이 모든 과정을 거친 전시장은 즉각 폐쇄되었다(전시는 영상 촬영 후 온라인 관람으로 전환됐다). 보통의 경우라면 설치를 끝낸 후 큐레이터와 작가들은 오프닝 행사에서 관람객과 손님을 맞을 준비를 한다. 그때부터 진짜 전시가 시작된다. 관객이 전시장을 찾고, 비평가가 전시를 평가한다. 기획자는 이때의 피드백을 살폈다가 다음 전시에 반영한다. 그런데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작품을 설치해놓고 전시장을 폐쇄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이런 상황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어떤 큐레이터는 이 상황을 두고 ‘전시가 치르는 희생비용’이라고 쓰기도 했다. 


코로나19 사태로 벌어진 전시장 폐쇄 소동은 이후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일차적으로는 기획자로서 전시라는 형태에 대해 고찰하게 만들었다. 전시라는 것이 뭔가? 전시의 형식은 작가와 작업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양한 규모와 형태가 존재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물리적인 공간에서 작가의 세계관을 작품을 통해 표현하는 것이 전시다. 전시를 준비하는 과정은 결코 간단하지 않다. 화이트 큐브든, 유휴공간이든 3차원의 공간에 작품을 나열하는 과정은 전문적인 손길을 요한다. 한 편의 전시를 준비하기 위해 수많은 인력과 자본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미술계가 전시라는 형식을 고수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렇게 힘들고 비싼 과정을 치르면서 전시라는 형식을 고집한 이유는 뭘까? 나는 지금껏 그 이유가 ‘관람객의 체험’이라고 생각해왔다. 현대는 이미지 범람의 사회이다. 디지털 영역으로의 접속을 통해 다양한 이미지를 쉽고 빠르게 접할 수 있다. 하지만 직접 물리적인 공간으로 걸어 들어가서 이미지를 ‘체험’할 수 있는 경험은 현재로서는 전시가 유일하다. 기획자로서 전시 체험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이유는 예술이 가지고 있는 고유성(authority)을 관람의 영역까지 확장하고자 하는 대의를 높이 평가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전시를 많이 관람하다보면 전시의 동선과 스토리라인에 따라 기획자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 작품 속에 숨겨진 작가의 감성과 질감 등이 몸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미지의 관람자가 전시에서 이런 컨택트(contact)의 순간을 느끼는 것은 기획자의 가장 큰 보람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온라인 전시로 관람의 패러다임이 전환되는 상황을 맞이하면서, 이 결정적인 순간에 대한 회의가 시작됐다. 인간이 전시 공간과 실물의 작업을 접하는 물리적인 접촉 없이도 작품을 온전히 느낄 수 있을까? 그것을 예술작품 관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혹은 그것이 가능하다면, 지금까지 진행해 온 전시라는 형식은 이제 사라지게 될까? 이런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물론 온라인 미술 감상이 전혀 새로운 매체는 아니다. 지금 당장 스마트폰에서 인스타그램 앱을 열면 각종 예술 관련 파워 인플루언서들이 전시와 작품을 다룬 콘텐츠로 물량공세를 펼치고 있다. 하지만 그 사진들이 실제의 전시와 작업을 완벽히 재현하는가? 혹은 그것이 실제의 예술 관람을 대체할 수 있는가? 이런 질문에 대한 나의 답은 “당연히 그렇지 않습니다”이다. 미술 교과서에서 보았던 명화들을 실제로 접했을 때의 당혹감과 감동을 잊지 못한다. 수 겹의 방탄유리에 둘러싸인 채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와 그 앞을 둘러싼 관람객들의 카메라 플래시 세례는 예술품의 화폐가치가 예술 가치를 오히려 전도시키는 현대사회 미술 비즈니스의 단상이었다.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는 고흐의 명성에 가려져 있던 수줍고 사랑스러운 별빛으로 빛났고, 마네의 ‹피리 부는 소년›은 소년의 붉은 바지와 눈빛이 너무나 노골적이어서 포르노에 가까울 정도로 대담한 작업이었다. 이 모든 주관적이고 섬세한 감정들은 작업을 ‘직접’ 눈으로 보고 경험하지 않으면 결코 얻을 수 없는 감상이었다. 그리고 이 감상들은 예술 감상이라는 마이너한 경험에 걸맞게 아주 미묘하고 개인적인 것들이다. 그런데 우리가 ‘예술’이라고 일컫는 것들의 속성을 돌이켜보면 이렇게 연약하고 비효율적인 것들이고, 좋은 예술가와 기획자는 이런 섬세함을 살리기 위해 1%의 마지막 감각을 활용해 싸운다. 하지만 코로나19 사태 이후 모든 전시들이 온라인과 이미지 매체로만 전개된다면 이런 감각이 더 이상 쓸모가 있을까? 어리둥절한 상태로 되물어본다. 코로나19가 예술 감상에 가져온 상실은 예술 창작에 미친 영향만큼이나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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