잇다

생각을 잇다지금껏 나를 이루던 것들을 벗어버리고는 대단히 위엄 있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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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출신의 SF 작가이자 환경 운동가인 반다나 싱의 소설 「자신을 행성이라 생각한 여자」는 이렇게 시작한다.


람나스 미슈라의 삶은 어느 날 아침에 영영 바뀌어버렸다. 그날, 지난 40년간 고수해온 의식대로 베란다에서 신문을 열심히 읽고 있던 그 앞에 아내가 찻잔을 탁 내려놓으며 선언했다. “마침내 내가 무엇인지 알았어. 나는 행성이야.”


“뭘 하는 거야, 정신 나갔어?”  엄하게 한 소리 하려는 남편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여자는 입고 있던 사리(인도 여성의 전통의상. 카스트에 의해 ‘순결’을 상징한다)를 벗는다. 그리고는 대단히 위엄 있게 말한다. 


“행성에게는 옷이 필요 없어.”




사랑에 빠졌을 때 우리는 상대에게 이입한다. 그에게 가까이 가고 그의 몸짓과 말투를 흉내 내고 마침내 그 자신이 되고 싶어 한다. 그를 알기 전과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서는, 내가 속하지 않았던 세계를 향해 겁 없는 발걸음을 내디딘다. 뭘 하는 거야, 정신 나갔어? 멍청한 질문에 대답할 시간조차 없다. 지금껏 나를 이루던 것들을 벗어버리고는 대단히 위엄 있게 말한다. 나는 너야.


내가 아닌 다른 존재가 되는 것. 이는 얼핏 위험해 보이지만, 자연 세계에서 동물이 자신을 보존하는 방식 중 하나이다. 가을이 되면 낙엽색으로 변하는 으름덩굴큰나방, 천적이 나타나면 바다 밑에 널려 있는 코코넛 열매처럼 위장해 걸어 다니는 인도네시아 문어, 날개의 무늬를 올빼미의 눈처럼 만들어 자신을 숨기는 올빼미나비……. 이들은 자연에 자신을 내맡기고 다른 동물을 모방함으로써 자신과 자신이 속한 종을 지속해나간다. 자연에 대립하거나 다른 동물을 없애는 방식이 아니라. 


인간-동물들로 이루어진 ‘이동시(이야기와 동물과 시)’는 으름덩굴큰나방과 인도네시아 문어와 올빼미나비를 본받고자 하는 창작 집단이다. 인간 중심주의에서 벗어나 동물을 하나의 주체로 보고, 그들의 관점에서 상상하는 자들이다. 인간-동물과 비인간-동물의 공통성을 인식하고, 인간 아닌 동물의 영혼을 대변하는 전문 번역가가 되는 것이 우리의 목표라면 목표. 우리와 다른 얼굴을 가진 동물이 되는 데에 주저함이 없다. 그들에게 가까이 가고 그들의 몸짓과 말투를 흉내 내고 마침내 그들 자신이 되고 싶다. 인간 아닌 동물이 되는 것. 그것이 이동시가 인간종에게 닥친 위기를 해결해나가는 방식이다. 




지난 8월, 이동시는 작가들이 각각 ‘동물이 되어’ 공동 선언문과 짧은 글을 낭독하는 퍼포먼스 ‹절멸›을 열었다. 인간종에게 코로나19바이러스라는 위기가 닥쳤기 때문이다. 코로나19바이러스는 박쥐에서 기인해 중간 숙주를 거쳐 인간에게 ‘스필오버(spillover)’된 인수 공통감염병으로 알려져 있다. 인수 공통감염병이란 인간과 동물 사이에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전파되는 질병을 말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동물 문제에 침묵한 채 증상 대응에만 급급했다. “코로나19바이러스의 원인은 동물 학대”(제인 구달)임을, 문제는 기후위기임을 증명하는 기사가 끊임없이 등장하는데도 오히려 바이러스를 옮기는 동물이라며 닭과 돼지, 박쥐에 대한 혐오만 이어졌다. 왜 동물의 병원체가 인간에게 건너오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알려고 한 적도 없으면서 말이다.



지난 8월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이동시의 ‹절멸› 퍼포먼스 현장. 사진은 각기 다른 시간대에 퍼포먼스에 참여한 작가들을 한 장면 안에 합성한 것이다. ⓒ이동시



왜 동물의 병원체가 인간에게 건너올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인간과 동물이 접촉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대유행 중이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아이콘이자 과학저술가 데이비드 콰먼은 말했다. 인간은 개체 수가 70억을 넘었으며 13년에 10억 명씩 늘어나고 있다. 인류의 몸무게를 모두 합하면 약 3,400억 킬로그램. 이 거대한 종은 오로지 경제 성장과 소비, 개인의 행복을 위해 숲을 베고 바다를 오염시켰다. 갈 곳을 잃은 동물들은 인간의 주거지로 들어왔고, 인간과 동물의 접촉 기회가 늘어났다. 


최근 인간을 스쳐 갔던 감염병을 떠올려보면 코로나19바이러스는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우연이 아니다. 주기적으로 찾아와 닭과 인간의 건강을 위협하는 조류인플루엔자, 전 세계를 공포에 떨게 했던 사스(SARS), 아프리카를 끔찍한 고통과 죽음으로 물들인 에볼라, 우리나라 전체를 마비시켰던 신종 플루와 메르스(MERS)는 모두 인수 공통감염병이다. 새로이 창궐하는 전염병의 75%는 동물에서 유래했으며 앞으로 도래할 미지의 ‘질병 X’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동시는 이동시의 방식대로 이 위기를 해결해보기로 했다. ‚동물-되기‘를 통해 질병 X 시대에 가장 필요한 변화를 말하고자 했고, 동물의 대리자가 되어줄 인간들을 긴급 소환했다. 경계를 모른 채 상상하고 이입하기를 일삼는 작가들. 언제나 타자가 될 준비를 하고 있는 시인, 소설가, 만화가, 시각 예술가, 뮤지션, 프로듀서, 유튜버들. 안녕하세요. 인간이 아닌 동물로 유언을 써주시겠어요? 메일을 받아들고도 당황하지 않고 ‹동물 목록›을 꼼꼼히 살펴봤을 이들. 어떤 동물이 될까 어떤 동물로서 말할 수 있을까 진지하게 고민했을 이들. 작가들에게 소환 메일을 보낸 후 천산갑이 되기로 한 김한민 작가와 침팬지가 되기로 한 나 현희진은 이런 문자를 주고받았다.


–    동물이랑 인간 이름이 같이 있으니 좋다. 

–     관점이 이동하고 있는 밤의 시간들을 생각해봐.

–     근사하지.

–     너무 신나! 

–     나 이제 침팬지처럼 걸을 거야.

–     나도! 


현희진 이동시 기획·편집자는 ‘침팬지’가 되어 선언문을 낭독했다. ⓒ이동시



나 현희진이 복화하기로 한 침팬지는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와 관련이 있다. HIV는 에이즈의 원인이 되는 바이러스이다. 전 세계 연구진은 1989년 에이즈가 침팬지와 인간 사이에 전파가 일어난 인수 공통감염병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사냥꾼이 침팬지의 고기를 발라내는 과정에서 감염된 혈액과 체액에 노출되며 전파되었으리라는 가설이 가장 유력하다. 1908년, 카메룬 남동쪽 구석 두 개의 강이 서로 만나 쐐기 모양을 이룬 국경 지역에서였다. 인간이 굳이 찾아가지 않았다면 바이러스가 넘어올 수도 없이 먼 지역이라는 말이다.


침팬지가 되기로, 침팬지를 사랑하기로 한 나 현희진은 가장 먼저 유튜브에 ‘침팬지’를 검색했다. 나 현희진은 침팬지처럼 걷고 침팬지처럼 손을 들어 올리고 침팬지처럼 울고 싶었으므로. 부끄럽게도 이전까지는 침팬지라는 동물을 잘 몰랐다. 침팬지와 고릴라의 엄밀한 차이를 몰랐다. 침팬지와 고릴라 모두 무언가 불편하거나 슬플 때면 가슴을 두드리는 것 같은데, 무엇이 다른지 알 수 없었다. 동물과 질병마다 자세한 정보는 이동시의 든든한 영장류학자 김산하 박사에게 질문했다. 인간이 침팬지에게 감기를 옮기기도 한다는 사실도 새로이 알게 되었다. 제인 구달 박사의 책에서도 많은 도움을 받았다. 


침팬지라는 동물에 관해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나 현희진은 침팬지 종 전체를 대변하는 동시에 단 한 명의 침팬지가 되고자 함을 느꼈다. 인간이 어떤 인간을 사랑하게 되고 그에 관해 말하고자 할 때, 그냥 다른 사람들 중 한 사람이 아닌 단 한 명의 ‘너’를 떠올리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나는 단 한 명의 침팬지가 되었다. 나는 어리고, 암컷이었으며, 끌레오라는 이름을 가진 엄마를 꼭 닮은 침팬지였다. 사랑하는 엄마 끌레오를 에이즈로 잃어버린, 나는 침팬지였다. 나는 침팬지처럼 걷고 침팬지처럼 손을 들어 올리며 침팬지처럼 울었다. 뭘 하는 거야, 정신 나갔어? 멍청한 질문에 대답할 시간조차 없었다. 지금껏 인간 현희진을 이루던 것들을 벗어버리고 대단히 위엄 있게 말해야 했다. 



“마침내 내가 무엇인지 알았어. 나는 침팬지야. 나는 인간이었고, 여자였고, 아내이자 어머니였지. 나는 내게 그런 거 말고 다른 건 없을까 늘 궁금했어. 이제 알았어. 나는 침팬지야.”


어리석은 남편은 대답한다. 


“당신은 침팬지가 아니야, 미친 거지.”


나는 남편의 대답을 무시하고 다음과 같이 유언한다. 


나 현희진은 침팬지고, 끌레오의 딸이다. 


끌레오 외에 다른 암컷은 없었으며 침팬지 외에 다른 신은 없었다.
끌레오의 마지막 산책을 생각하는 날이면 나는 중얼거린다
까메룬 남동쪽 구석 두 개의 강이 만나는 곳


사람들은 거울을 모르는 것처럼 보인다
크고 둥근 귓바퀴 선명한 지문
그들은 끌레오의 우아한 육체를 맨손으로 발라 먹었다
부스럼이 자라나 무고한 연인의 밤까지 간지럽혔다


나는 태어나자마자 예뻤다.
다들 내가 끌레오를 닮았다고 말한다
감기에 걸린 날에도 나는 머리를 빗고 집을 잃어버린 날에도 나는 눈동자를 닦는다
나무를 베고 구토를 하는 여행자를 훔쳐보기 위하여


아픈 눈에 내 얼굴을
주사 바늘을 찌르는 벌건 눈에 내 예쁨을 비추어보다가


가슴을 두드린다



사진 3 : 이동시의 소식과 작가들의 선언문 전문은 이동시 인스타그램(@edongshi)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동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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